여행 이야기/2003~2005

2004 일본 여행기 '청춘18로 Go!!' Day2 -히로시마, 오사카- (12/12/2004)

GONZALEZ 2005. 5. 20. 16:01

 옆 객실에서 이야기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8시가 채 안되는 시간이었다. 배는 이미 히로시마 항에 도착해 있었다.
일어나서 이나바 형과 함께 목욕을 한 뒤 한국에서 사온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웠다. 바로 내려주면 좋으련만 세관직원이 출근하는 9시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하릴없이 배 안에 있어야 했다.

 이윽고 9시가 되어 승객들이 하선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서둘러 짐을 챙겨들고 배에서 내렸다. 입국수속과 세관검색을 마치고 히로시마 국제항을 나서 히로시마 역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일본의 버스는 한국과는 달리 뒷문으로 타서 앞문으로 내리며 요금은 내릴때 지불한다.(지역마다 다름) 그 사실을 몰랐던 한 한국관광객이 뒷문을 붙들고 '아게테 구다사이~!' 라고 애절하게 외쳤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긴 '아케테(開けて)' 도 아니고 '아게테(上げて)' 라니 들긴 뭘 들란 말인가.



버스 안에서. 들고 있는 것은 승차권.



 히로시마 역에 내린 우리는 JR의 미도리노 마도구치(みどりの窓口)로 가서 청춘 18(靑春18きっぷ) 과 문라이트 나가라(ム-ンライトながら) 의 지정석 티켓을 구입했다. 청춘 18은 일종의 할인패스인데, 11500엔으로 5일간 JR의 보통열차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연속 5일이 아니라 유효기간 내에 자신이 원하는 날짜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계획만 잘 짜면 5일 이상의 효과를 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JR패스 7일권이 28300엔이란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같은 여행객들에게 청춘 18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문라이트 나가라는 칸토(關東)와 칸사이(關西)를 오가는 야간열차로, 청춘 18로 탑승 가능하나 대부분의 구간이 지정좌석제로 운행되기 때문에 지정석 티켓이 필요하다. 패스설명은 여기까지만;;)

 청춘 18로 탈 수 있는 열차로는 오사카나 도쿄까지 한번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내려서 다른 열차로 갈아타는 것을 반복해야 했다. 열차 타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6~7시간을 꼼짝못하고 기차 안에서만 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신칸센을 탄다면야 간단하겠지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니까.



문라이트 나가라 지정석 티켓. 왼쪽에 들고 있는 건 밤에 탈 오가키(大垣)→아타미(海) 구간.


환승을 위해 내렸던 오카야마(岡山)에서 먹은 카레.



 6시쯤 되어서 우리가 탄 열차는 오사카에 도착했다. 일본에 온 김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얻어 일본에 거주중인 친척동생 담군과 만나 저녁을 같이 하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도쿄행을 잠시 미루고 오사카역에서 내려 약속장소인 난바(難波)로 향했다. 히로시마에서부터 흐릿흐릿하더니 오사카에서는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난바역 앞에서 담군과 합류한 우리는 부탁받았던 물건 몇개를 건네주고 저녁을 먹으러 한 오코노미야키(お好み燒き) 가게로 들어갔다. 일본에는 전에 한번 가보았지만, 일주일 내내 참치캔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던 나로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먹게되는 일본음식인 셈이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역 근처의 백엔샾에 들렀다. 오늘도 그랬지만 앞으로의 여정 또한 험난할 것이기에 이것저것 준비해 둬야 할 것 같았다. 나 역시 신고 온 신발의 밑창이 뜯어져 덜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에-_- 접착제가 필요했다.



오코노미야키


백엔샾에서



 백엔샾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고 나온 우리는 열차를 타기 위해 난바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길이 올때랑 조금 다르다 싶더니 난바역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 근처의 백엔샾이었으니 금방 도착해야 할 터인데.. 마음은 급한데 수많은 인파 속에 비까지 내리니 우리의 발걸음은 점점 더뎌지고 있었다. 간신히 역을 찾아와 오사카역으로 향했지만, 우리가 타야 할 오가키 행 열차는 떠난 뒤였다.

 어떻게든 문라이트 나가라의 출발시각인 11시 19분까지 오가키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므로 이나바형은 필사적으로 열차시간표를 뒤져가며 다른 루트를 찾아보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만엔이 넘는 신칸센을 타야만 한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말았다.

 이번 여행의 성패는 돈과 시간을 최대한 절약하는 것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그 둘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우리에겐 타격이 컸다. 결국 오늘 밤은 오사카에서 보내기로 하고 잘 곳을 알아보았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곳은 두가지였는데, 민박과 실내온천 스파월드였다.

 나는 내심 스파월드를 원했는데, 어차피 새벽부터 도쿄행 기차를 타야하기 때문에 고작 몇시간 자려고 민박을 가기는 조금 뭐하다 싶기도 했고, 온천에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나바 형도 동의해서 우리는 스파월드가 있는 텐노지(天王寺)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타러 갔다. 그리고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JR 오사카역의 개찰구를 지나가는데 이나바 형과 내 사이에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그는 뭔가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지 역무원을 붙들고 쉴새없이 질문공세를 퍼부어댔다. 이 퀘스천 맨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동안 이나바 형은 그걸 알아채지 못한 채 플랫폼으로 향했고, 내가 간신히 개찰구를 빠져나온 사이 이나바 형은 나의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좀 비켜..TT



 이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이나바 형도 내가 안보인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라는 생각에 곧바로 플랫폼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열차가 세번이나 지나가는 와중에서도 이나바 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또 나의 급한 성격이 불난 데 기름을 붓고 마는데, 이나바 형이 내가 뒤에 쳐졌다는 것을 모른채 먼저 탄 것이 분명하다고 지레짐작하고 텐노지 행 열차를 타버린 것이다. 좀 더 진득하게 기다려 보지 않고서.

 하지만 당연히(?) 텐노지에서도 이나바 형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국제미아인가..?

 나는 일단 중앙 게이트로 향해 역무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 빌어먹을 역무원은 그저 멀뚱멀뚱 날 쳐다보다 다른데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마치 '뭐 어쩌라구' 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다시 말을 걸기도 뭐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서있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고, 어디선가 나타난 양아치들이 노숙자 할아버지 한명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위축되있던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여기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반대편에 있는 동쪽 게이트로 피신(?)했다. 그래도 아까 그 놈과는 다르겠지.. 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역무원에게 말을 건네려는 순간 어디선가 내 이름이 들려왔다. 이나바 형이 나타난 것이다.

 미아보호소에서 엄마를 만나는 아이들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이 때의 기분은 정말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형 역시 승강장에서 내가 안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개찰구 쪽으로 내려왔다는데.. 아마 여기서 형과 엇갈린 것 같았다.

 난 플랫폼에서 이나바 형을 기다렸는데, 형은 개찰구 쪽에서 날 찾아다녔으니.. 그러다 전철역의 협조를 받아 안내방송까지 했지만 난 그때 이미 텐노지로 가는 열차를 탄 뒤였다. 결국 이 곳에 없다면 내가 갈 곳은 텐노지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나바 형은 마지막으로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아! 드라마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아무튼 감격적인 재회 후 우리는 스파월드로 갔다. 스파월드는 정확히 텐노지에 있는 것은 아니고 몇정거장 떨어진 신이마미야(新今宮)에 있었다.

 짐을 코인라커에 넣어두고 이름을 기입한 뒤 키를 받아 온천 안으로 들어갔다. '세계대온천' 이란 어마어마한 이름답게 안에는 가지각색의 테마로 꾸며진 탕들이 있었는데 늦은 시간이라 사람은 거의 없었고, 우리는 꼭 오늘 하루의 고생을 보상받기라도 하듯이 살이 불어 터질때까지 이탕 저탕을 순회한 끝에야 휴게실로 향했다.



스파월드 앞에서


로비에는 피카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