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原 久美子

Family Trap ~콘프레이크 먹어요?~ 관람기 Day2(6/14/2009)

GONZALEZ 2009. 8. 30. 21:37

 9시 반에 알람이 울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한숨을 쉬었어도, 아직 내게는 티켓 한장이 더 남아있다.

 일본 건너오기 전만 해도 별로 있지도 않은 일요일 오전을 어떻게든 활용해 본답시고 시간을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고 있었지만, 어젯밤 이후 그런 시덥잖은 계획들은 모두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하루종일 알바를 해야하는 김군은 아침 일찍 가게로 나갔고, 나 역시 11시가 좀 안되어 집을 나섰다.

 오늘은 어제와 다른 하루가 될 수 있을까..


 여전히 이 길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갔던 길과 똑같이 걸어서 스페이스 107을 찾아갔다. 사실 찾아보면 올바른 길이 있을텐데, 그거 찾겠다고 또 헤메느니 그냥 안전빵을 택하는게 나을 것 같았다.

 스페이스 107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30분이 조금 지나서였는데 아직 사람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대충 예상은 했었고 또 이걸 노리고 이시간에 온 것이긴 하지만 정말로 극장 앞에 아무도 없으니 약간 뻘쭘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서? 눈치를 좀 봐야하나..?' 약 10초 정도 고민을 하다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극장 현관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극장 안에서는 연출가인 오오구시 히로후미 씨, 도시락 배달원, 출연진 중 한명인 호아시 모모코 씨 등이 바쁘게 현관을 들락거렸다. 시간 때울 거리라고는 전혀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수첩을 꺼내 어제부터의 사건록(?)을 하나씩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시간이 흐르고, 예의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극장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유석 줄이 만들어질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1,2번을 차지하던 그들이었지만 오늘은 내가 한발 빨랐다. 그들은 마치 98 드래프티들이 마이클 올로워캔디를 바라보는 눈빛(뭐야 이 듣보잡은!!??) 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윽고 내 뒤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대단한 팬인지 어쨌는지 나는 몰라.

 하지만 오늘 만큼은 내가 1인자!

'당신이 1등이요'
'오 맙소사'



 맨 앞자리를 차지한 건 좋았는데, 사실 좋다가도 좋지 않았다.

 3년 동안 공연에 참가하면서 어렴풋이 알게 된 거지만, 극장 규모도 그렇고 애당초 극단 블랑샤의 관객층이란건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보니 이곳에 모인 관객들은 대부분 이전부터 친목이 있던 관계들이 대부분이었다. (스탶 및 배우들과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수록 그 목소리는 더욱 커져갔고 남의 집 잔치에 잘못 찾아온 것 마냥 그 안에 내가 끼어들 구석은 없어 보였다. 내가 지금 와서는 안될 장소에 온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행렬 앞의 내 모습은 이질적인 것이었다.

 말할 수 없는 고독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수첩만 바라보고 있는데 극장 안에서 마츠모토 타카코 씨가 올라왔다. 마츠모토 씨는 맨 앞에 서있는 나를 보더니 어제처럼 묻는다. '宋さん?' 다시 멍해진 나에게 마츠모토 씨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게 건네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거 쿠미코 씨가 전해 주는거예요. 매년마다 한국에서 와줘서 고맙다고..' 

 네? 뭐라구요??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마츠모토 씨가 건넨 것은 '패밀리트랩' 출연진들의 단체컷이 담겨있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니시하라 씨의 자필 싸인과 함께 이렇게 메세지가 적혀 있었다.

 '언제나 한국에서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키-'

 숨이 턱 막히면서 나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어버버 하고 있는 나에게 마츠모토 씨는 '특별히 宋さん한테만 주는 거니까 다른 사람 모르게 숨겨요^^' 하시고는 다시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사진 자체도 물론 분에 넘치는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기뻤던 것은 바로 내가 한국에서 오고 있다는 것을 니시하라 씨가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이었다.

 마츠모토 씨는 숨기라고 했지만, 나는 한참동안 사진을 집어넣지 못한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필요없다



 이윽고 정리권 배부가 시작되었고, 나는 당당히; 1번을 획득하였다.

 입장은 1시 20분 부터였기 때문에 잠깐 남는 시간 동안 편의점에 들러 극중에서 나왔던 아이템인 '도쿄 바나나' 를 나름 선물이랍시고 구입해 극장으로 돌아왔다.

 다시 시간이 흘러 입장열이 만들어지자 (자꾸만 강조하지만)맨 앞에 있던 나는 첫번째로 극장 안으로 입장하게 되었다. 맨 앞줄 정가운데 좌석을 내가 차지하자 그동안 이 부근 자리를 독차지해오던 사람들이 홍해가 갈라지듯 내 옆으로 자리잡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팔불출이라고 비웃어도 좋아 이게 지금 내 가장 솔직한 감정.


No.1


도쿄바나나



 공연이 시작되었고, 나는 코앞에서 니시하라 씨를 볼 수 있었다.

 천추락 공연은 몇몇 장면들을 애드립으로 처리한 걸 제외하면 이전 공연들과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워낙 잘 짜여진 각본 덕에 세번째 관람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이라고는 1g도 느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날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바로 앞에서 니시하라 씨의 연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 다른 때와는 달랐다. 가요쇼 시절 TV화면으로만, 극장 저멀리에서만 바라보던 니시하라 씨의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이미 감동이었다.

 공연이 끝난 뒤 가진 무대인사에서는 특별히 아카히라 텟페이 씨가 감사인사를 전하는 시간이 있었다. 본인의 손으로 완성한 무대를 성공적으로 끝마칠 때의 기분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아카히라 씨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해 말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출연진 전원이 인사를 마치고 막이 내리기 직전, 어느때처럼 카와모토 히로유키 씨가 니시하라 씨 목에 둘러져 있던 자이언츠 타올을 객석을 향해 집어던졌고, 나머지 출연진들도 바나나 모양의 인형을 하나씩 던지기 시작했다. 나도 운좋게 출연진 중 한분인 나카무라 유조 씨가 던진 바나나를 얼굴로 받아낼 수 있었다ㅡㅡ;

 대충 앙케이트를 작성해 스탶에게 건네주고 복도로 나오자 테이블 앞에서 관련 상품들과 공연에 쓰인 소품들의 경매가 진행되고 있었다. 소품 중에는 바로 내가 받았던 사진도 있었는데 단 한장 만을 경매로 판매하고 있었다.

 경매가 정리되고 사람들은 하나둘 극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까 사왔던 도쿄바나나를 전해드려야 하는데 어제 있었던 일은 그새 잊어버렸는지 나의 고질병인 소심증이 또다시 발동하기 시작했다. 사실 공연 시작 전에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선물을 받은지라,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라는 안이한 마음도 있긴 있었다.

 니시하라 씨는 언제 나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스탶 중 아무나 붙잡고 선물을 전하려 하는데 나는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우물쭈물대다 왠지 다들 돌아가는 듯한 분위기에 휩쓸려 극장을 나오고 말았다.

나는 또 여기서 주저앉고 마는 것인가..


 또 한번 좌절감에 사로잡혔지만 나와버린 건 어쩔수 없는 것이고, 일단 밖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는데 츠쿠이 쿄세이 씨가 짐을 싸들고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서 몇몇 스탶들이 계단위로 올라왔는데, 그 중에는 마츠모토 타카코 씨도 있었다.

 현관을 나와 잠시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마츠모토 씨는 날 발견하자 반가운 얼굴로 다가와 또 다시 먼저 말을 건넸다. 니시하라 씨는 지금 정리 중이라 나올수가 없다면서, 아쉽겠지만 대신 한국의 주소를 알려주면 앞으로의 공연 정보를 항공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는 내게 또 무언가를 내미시는데, 바로 이번 'Family Trap' 공연의 포스터였다. 마츠모토 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판매목적이 아니라 홍보용으로 소량만 찍은 물건이라고..

 극장 안에서 끝내 아무에게도 전하지 못했던 도쿄바나나를 마츠모토 씨에게 건네주고(달랑 12개 들어있는걸 스탶들 나눠드시라고..-_-), 몇마디 얘기를 더 나누다가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저, 니시하라 씨를 만나고 싶은데요..'



 너무나 무례한 요청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구질구질한 변명이나 합리화 같은 건 할 생각도 없지만 아무튼 난 그렇게 말했다.

 마츠모토 씨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번 한번만 특별히 만나게 해주겠다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마츠모토 씨를 따라 스페이스 107 안으로 들어가자, 마츠모토 씨는 출연진들이 대기하는 복도 구석에서 잠시 날 세워둔 뒤 니시하라 씨를 부르러 갔다. 그 잠깐 동안의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복도 너머로 마츠모토 씨와 니시하라 씨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니시하라 씨와 마주보고 있었다.


필름끊김



 그 뒤로 니시하라 씨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안난다. 분명 무어라 횡설수설 대기는 했는데 그냥 머리속이 하얘져서.. 아마 기억이 난다고 해도 마땅히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무대의 뒷정리를 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이자리에서 길게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작별에 앞서 니시하라 씨는 포스터 한장을 더 꺼내서 직접 싸인을 해서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서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없는지를 여쭤보았고, 니시하라 씨는 마츠모토 씨와 잠시 상의하는 것 같더니 인터넷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쾌히 승낙해 주셨다ㅜㅜ

 카메라 앞에서 경직된 자세로 벌벌 떨고 있는 나에게 마츠모토 씨가 포즈를 잡아 볼 것을 권했고, 니시하라 씨가 먼저 손으로 V자를 그려서 나도 어렵사리 같은 포즈를 취해 보았다. 그리고 꿈에서도 그려보지 못했던 니시하라 씨와의 투샷! 그다지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이제 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극장을 나서려는 나에게 니시하라 씨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나는 그저 감사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마츠모토 씨에게 좀 전에 적어달라고 했던 한국 주소를 영어로 써서 전해 준 뒤 나는 다시 극장 밖으로 나왔다. 첫날부터 여러모로 배려해주신 마츠모토 씨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전한다.

 아직 스페이스107 앞에는 사람들이 많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 앞에 잠깐 서있다가 5시 쯤 발길을 돌렸다.

 '이봐 내가 받은 것들을 좀 보라구!!' 라고 소리지르고 싶었다 :-P


 의외로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던 아키하바라를 갈 수 있었다. 10개월 만에 찾아 온 아키바는 여전히 볼 게 하나도 없었지만.

 대충 큼지막한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부탁받은 물건들을 찾아다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난 맞아도 별 상관이 없었지만 포스터가 젖어버리면 큰일이었기 때문에 방수대책을 강구하다가 한 가게 앞에서 우산 비닐을 받아 포스터를 밀봉해버렸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지만 이제 신경 쓸 일은 없다.

 

비는 쳐맞았지만 불쾌하지는 않습니다.



 아키하바라에서 볼 일을 다 마치고 다시 신오쿠보로 돌아온 나는 귀국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10시 20분 쯤 김군의 집을 나와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30분 무렵.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4시 45분에나 출발하니 그때까지 또 이 비좁은 곳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휴가는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잠 한숨 못자고 출근해야 할테고, 거기다 비행기 도착 시간으로 미루어볼 때 지각은 100% 확정이다. 암담하기 그지없는 월요일이 예상되었지만 나는 한숨 대신 피식 웃고 말았다.

 본격적으로 니시하라 씨의 팬이 된 것은 2003년부터였으니 그 뒤로 6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굴곡도 있었고 한때는 감당하기 힘든 좌절감에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길었던 기다림은 나에게 오늘과 같은 순간을 가져다 주었다.

앞으로 있을 고통(?)들은 내가 받은 것들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작은 올로워캔디였지만, 나는 빈스 카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