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전날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퇴근해서 내일부터 필요할 것들을 챙기고 있는데 프린터가 작동이 안되는 것이다. 아니 당장 공항에서 로밍폰 확인서도 필요하고 지도도 뽑아야 하고 무엇보다 당장 항공권 e티켓 출력도 안했는데 프린터가 안되다니! 전원을 껐다 켜고 포트를 뺐다 끼우고 프로그램을 삭제했다 재설치하고.. 별짓을 다해도 프린터는 종이를 뱉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렇게 세시간 가깝게 허비한 듯.. 기나긴 삽질 끝에 간신히 프린터를 되살려낸 뒤(어떻게 한 건지는 모름) 필요한 서류들을 출력하고 짐 정리를 마무리 한 뒤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출발 당일의 상황은 더욱 그지 같았다.
내가 늦잠을 잔 것이다-_-
비행기 출발 시각은 8시 55분인데 우리가 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딱 8시였으니 말 다했죠.
수속 데스크에 있던 누나는 우리가 제일 마지막으로 왔다면서 이미 자리는 꽉 찼고 떨어져 앉아야 한다고 한다. 뭐 별수 있나.. 티켓을 건네 받고 로밍폰을 찾고 출국심사를 받으러 가는데 이거 사람이 너무 많다.. 공항 직원한테 묻자 사람이 적은 쪽을 알려주길래 그쪽으로 출국심사장을 빠져나왔다.
자 이제 복잡한 건 다 통과했고 한숨 돌릴 수 있겠지.. 싶었는데 이번엔 이나바 형한테 부탁받은 면세품을 찾아야 했다. 이때 시간이 8시 40분 쯤이었나 아마?
형을 먼저 게이트로 보내고 면세품 인도장으로 향하자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서 있었다. 대기번호대로는 도저히 시간 안에 끝내는 건 불가능해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면세품을 찾아 나왔다.
이제 게이트를 향해 뛰어가는데 공항 구조가 조금 바뀐 듯 했다. 몇주 전에 갔을 때만 해도 출국심사대만 통과하면 바로 게이트였는데, 이제는 또 무슨 셔틀같은 걸 타야 되는 것이다. 안그래도 시간없어 죽겠는데 미치겠구만...
셔틀에서 내렸을 때 55분은 이미 지난 뒤였다. 설마 날 남겨두고 떠났을까 싶으면서도 미친듯이 뛰어갔다. 멀리서 멀리서 게이트가 보이고.. 난 텅 빈 게이트에 형 혼자 초조한 표정으로 서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왠걸 이제사 다른 승객들도 막 탑승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무튼 안도감에 긴장이 풀리면서 힘이 쫙 빠지는데.. 아놔 아직 출발도 안했다고.
한국은 맑았는데, 나리타에 도착하니 날씨는 별로 좋지 않았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케이세이 전철역에서 열차를 타기 전에 로밍폰 사용법을 먼저 알아두기로 했다. 아무래도 주 용도는 내가 공중전화에서 형의 휴대폰으로 거는 것이 될테니 미리 알아두는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마땅한 매뉴얼이 없는것이다. 한참을 씨름하다 결국 KTF에 전화를 걸어서야 제대로 된 사용법을 알아냈는데, 여기서만 또 30분 이상 소비한 것 같다.
열차를 타고 죽 닛포리까지 간 다음 여기서 평소와는 달리 JR 죠반선으로 갈아 타 미나미센쥬로 향했다. 이번에 묶게 될 곳도 바로 호텔 아쿠세라. 둘이서 3박 이상으로 예약했더니 1박에 2400엔..⊙o⊙ 3000엔 넘게 내고 민박 다인실 가느니 이쪽이 낫지.
JR 미나미센쥬역은 히비야선하고는 달리 길이 좀 떨어져 있어서 호텔 찾아갈 때 조금 헷갈리게 했다.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까지 마치고 밖으로 나온 시간은 세시.. 원래는 적어도 두시까지 호텔에 도착해 일정을 시작할 계획이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늦어버렸다..
나리타 공항 역에서
미나미센쥬 역으로 가는 육교 앞에서 찍은 거리의 모습. 아쿠세라는 저 멀리.
호텔을 나온 우리는 단도직입적으로 아키하바라로 향했다.
작년에 오사카 갔을때 시간에 쫒겨 덴덴타운에서 별 재미를 못 본 것도 있고 해서 이번 여행은 좀 더 덕후도를 높혀보기로 했다. 히비야선 미나미센쥬 역에서 아키하바라는 금방이었다.(5 정거장)
지상으로 올라와 츄오도리 쪽으로 나오자 번쩍번쩍 거리는 전기상가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래지는 형을 볼 수 있었다. 5년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흐흐
김군과 함께 몇번 가봤던 カレキチ란 카레집에서 일단 늦게나마 점심을 먹고 다시 아키하바라 탐방을 시작하는데, 사실 이날은 6시에 도쿄 돔에서 야구를 볼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어차피 여긴 나중에 몇번이고 또 올테니 맛배기로 소프맙과 옆에 있던 오락실 한군데를 둘러본 뒤 우리는 다시 전철을 타고 도쿄 돔이 있는 스이도바시로 향했다.
아키하바라
역 앞의 메이드
슈퍼로봇대전 Z의 프로모션 비디오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작년에도 도쿄 돔에서 경기를 보긴 했지만 난 결코 요미우리의 팬은 아니다.
올해는 꼭 요코하마의 경기를 보고 싶었는데 마침 27일에 도쿄 돔으로 원정을 온다는 소식에 냉큼 김군을 통해 티켓을 예약했다. 이달 초에 피치크린 보러 오면서 김군에게 티켓도 받아뒀고, 타이밍 좋게 올림픽도 끝났으니 팀의 주축선수들도 볼 수 있을 것이다.(그래봤자 무라타 한명)
아무튼 둘이서 아주 신나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며 3루쪽 입장 게이트로 향했고, 짐검사를 통과해 티켓을 보여주는데 먼저 들어갔던 형에게 진행요원이 티켓을 들고 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뭐가 잘못됐나.. 하고 있는데 형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하는 말이..
'오늘 표가 아니라는데?'
하하 무슨 재미없는 농담을..
뭐, 뭐라고!!!!
오늘은 27일. 그런데 우리가 들고 있던 티켓은 28일. 티켓을 뒤집어 보니 '환불 및 교환은 불가'
믿었던 김군에게 발등 찍힌 우리는 화 낼 기운마저 잃어버린채 게이트를 돌아나와 도쿄돔 시티의 어트랙션이 내다보이는 화단에 한참을 걸터앉아 있었다.
어찌보면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닐 수도 있었다. 티켓 예매를 안 한 것도 아니고 있던 티켓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단지 날짜 하나가 바뀌었을 뿐이다. 야구는 내일 보러 올 수도 있는 것이니.
하지만 내일은 이미 오다이바에서 하나비를 보는 걸로 일정이 잡혀있었다.
그리고 단순히 하나비를 보고 못 보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거 하나 때문에 그동안 머리싸매고 짜왔던 5박 6일의 계획이 다 엉망이 되고 마는 것이다. 모처럼 형과 함께 즐기려고 온 것인데 첫날부터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당일권을 구입하러 매표소로 뛰어갔다.
도쿄 돔 시티 앞에서.
무슨 배팅연습장 앞이었던 듯
경기장으로 향하며
나가시마 게이트
입장을 앞두고.. 이때까지만 해도 좋았지.
콰광..
경기장에 입장하니 이미 시합은 시작되어 요코하마의 2회초 공격이 진행중이었다.
일부러 3루측 자리를 잡았는데 이쪽도 거의 요미우리 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요시무라가 투런 홈런을 터뜨리며 2-0 요코하마 리드. 요미우리의 선발 번사이드는 초반부터 제구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2군에서 복귀한 이승엽은 이날 선발에서 제외되었다.
2회말 요미우리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요코하마의 선발투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우라 다이스케 선수였다. 올시즌 요코하마의 전력이 워낙에 안습이라 에이스인 미우라조차도 5승에 그치고 있었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초반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번사이드의 구위가 차차 안정되어 가기 시작했고, 몇번 아쉽게 점수를 뽑는 데 실패한 요코하마는 어느새 물타선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미우라도 호투했지만 4회와 6회 한점 씩 내주면서 점수는 2-2. 우리 주위에 앉아있던 요미우리 팬들은 타올을 머리위로 빙빙 돌려대고 있었다.
8회초 찬스를 맞이해 미우라 타석에 대타를 내보내는 작전이 실패하면서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나마 미우라의 선방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불펜투수들은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8회말 구원투수 오야마다가 퇴물 오오미치에게 솔로홈런을 얻어 맞으면서 요미우리가 2-3 역전.. 그리고 9회초. 요코하마 팬으로써 가장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작년까지 베이스타즈의 뒷문을 지키던 마크 크룬이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올라온 것이다.
가볍게 158km을 뿌려대는 크룬의 강속구 앞에 요코하마 타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경기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당일권 살 때 받은 아베 이름이 각인되어 있던 타올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자리를 떴다가, 형에게 부탁해 다시 주워오는 추태를 부렸다-_-
이게 당일권(나중에 찍은 것)
2회초 진행 중
죄다 요미우리 팬
요시무라 선제 투런!!
돔 천장을 찍어 봤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나팔을 불며 열성적으로 응원하던 요코하마 응원단.
요코하마 선발 미우라.
역투했으나 승리로 이어지진 못했다.
치어리더들의 공연
클리닝 타임
KROON SUCKS!!
이놈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가볍게 던진 공이 154km
결국 요코하마의 패배.
이승엽 저지를 입고 응원하러 온 여성팬.
경기가 끝나고
점수가 많이 나지 않았던 경기였지만 생각보다는 시간이 걸려서 시합이 끝났을 때는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8시 30분 전후로 게임이 끝났다면 곧장 신주쿠로 가서 도쿄도청에 들렀다 올 생각이었는데 그건 무리 같았고, 신오쿠보에서 김군을 만나 (티켓 잘못 산 보답으로) 밥이나 얻어먹기로 했다. 김군한테 받아와야 될 물건도 있었고.
도쿄 돔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경기장 앞의 야구용품샾에서 무라타의 이름이 새겨진 베이스타즈의 파란색 티셔츠를 구입하며 다음번엔 꼭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응원하고 말겠노라고 다짐했다.
오쿠보 역에서 내려 전화를 건 뒤 신오쿠보 역 쪽으로 걸어가자 곧 김군을 만날 수 있었다. 김군은 미안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가난한 유학생을 더 이상 책망하고 싶진 않았다. 나중에 술이나 쏘라고 한 뒤 밥을 먹으러 신주쿠로 나와서 어느 식당에 들렀다.(이름이 기억 안남)
뒤늦은 식사를 마치고 김군의 집에서 지난번에 맡겨뒀던 짐들+아마존에서 배송받은 물건들을 싹 챙겨들고 나왔다. 내가 이렇게 많이 샀었나. 부탁받은 물건들도 있지만..
형과 두개 세개씩 쇼핑백을 나눠들고 다시 신오쿠보로 향하려는데 비가 한두방울 씩 오는 것도 같다. 김군은 우산을 빌려주겠다며 커다란 우산 하나를 꺼내들고 오는데, 짐을 이렇게 든 상태에서 그런 우산을 들고 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것 같고, 나중에도 짐이 될 것 같아서 사양하기로 했다.
호텔에 도착해 샤워를 마치고 빨래도 돌리고 이것저것 정리 한 뒤(성인방송도 보다가) 자리에 누우니 시간은 새벽 2시가 넘어있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엉망진창이었지만 아무튼 하루가 지나간 것이다.
무슨 우동이었는데 이름을 까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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