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전날 일찍 자두려 했는데, 어째서인지 잠이 오질 않았다. 한참동안 이불을 붙들고 레슬링을 하면서 눈을 붙여보려고 기를 썼지만, 결국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하고 일어나야만 했다.
짐을 싸들고 나오니 밖은 생각지도 못했던 비가 내리고 있다. 안그래도 좋은 일 때문에 일본에 가는 게 아닌데, 출발부터 제대로 분위기를 깔아주고 있었다.
우울하게스리
나리타에 도착하자 한국과 달리 일본은 쨍하고 해가 떠있는 맑은 날씨였다.
케이세이 전철에 올라타자 이날 유독 열차 안에 사람이 많았다. 잠도 못잤는데 닛포리까지 서서 가야되나 하는 생각에 약간 막막한 기분이었으나 다행히 곧 자리가 나서 앉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가는 동안 부족한 잠을 보충해 두려고 머리를 틀어박았는데, 한참 잔 것 같아서 시계를 보니 고작 5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뭐야 하면서 다시 눈을 감았지만 곧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고, 나는 닛포리에서 내릴때까지 계속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고 있었다.
닛포리에서 JR로 갈아타러 가니 주말인데 날씨도 좋고해서 꽃구경이라도 가는지 이쪽에도 사람들이 무척 붐비고 있었다.
혼잡한 가운데 열차는 신오쿠보에 도착했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내려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작년부터 계속 신세지고 있는 김군의 집을 찾아가 짐을 풀어놓고 쉬면서 오늘 하루의 계획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태정낭만당의 토크이벤트는 28일 요코야마 치사씨의 출연을 마지막으로 끝났고, 이후 29, 30 양일 동안 '사쿠라 축제(サクラ祭り)' 라는 이름의 이벤트가 계획되어 있었다. 태정낭만당 홈페이지나 일본쪽의 사쿠라대전 게시판들을 계속 체크하고는 있었지만, 이벤트가 어떤식으로 펼쳐질지는 예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일단 바로 태정낭만당으로 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이케부쿠로에 도착해 세가 GIGO 앞으로 가자마자 나는 먼저 태정낭만당 간판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김군은 사진 찍어달라고 데려왔다-.-) 2003년부터 수십번을 오갔으면서도 정작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게 신기했다.
오늘은 오후 내내 태정낭만당에 있다가 카페에서 밥이나 먹고 돌아오기로 계획하고 엘레베이터에 올랐는데 이상하게 7층 버튼이 눌러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발견한 문구
'이 층에는 멈추지 않습니다'
식겁한 우리는 잽싸게 5층을 누르고(6층은 여성전용이다. 프리크라..) 내려 이 뜻밖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어제 잠이 안와서 새벽까지 인터넷을 했었지만 태정낭만당 측에서의 특별한 공지는 분명 없었다. 황당한 마음으로 1층으로 내려와 다시 엘레베이터 앞에 서니 문 앞에는 이런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정리권을 가지고 계시지 않은 분의 입장은 19:00 부터입니다. -태정낭만당-'
정리권이라고?? 나는 그런 공지 못봤는데!!! 지금 외국인이라고 차별하는 거임??
사실 대충 짐작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마도 새벽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태정낭만당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을 테고, 이에 급당황한 스탶들이 정리권을 배포해서 인원을 정리한게 아닌지.. 아무튼 시작부터 계획이 틀어지고 만 우리는 방향을 돌려 아키하바라로 향했다.
이걸 잊다니.
아키하바라에서는 별로 할 일도 없었다. 게임을 사러 온 것도 아니고, 길거리 공연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아키하바라까지 와서 할일이 없을 수 있다니 몇년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막장 다 됐구나...-.- 뭐 그냥저냥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우다가 조금 일찍 이케부쿠로로 돌아왔다.
다시 GIGO 앞으로 향하니 짐작은 했지만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입장은 7시부터라고는 하지만 이래서는 제시간에 입장하기엔 힘들어 보였다. 이런 팬들이 있는데 정녕 폐점이란 말인지..
곧 7시가 되어 입장을 시작했는데 어째 지난 토크이벤트 때와는 달리 줄의 진행방향이 정반대인가 싶더니 모퉁이를 돌아 건물 뒷편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맞이한 태정낭만당의 또다른 입구는 바로 비상계단이었다.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지금껏 어디에서도 이런 팬서비스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 누가 폐점기념이라고 비상계단까지 타게 해준단 말인가(...)태정낭만당은 7층. 엘레베이터 따윈 없었다. 노약자에게도 자비란 업ㅂ다. 우리는 헉헉대며 낭만당 스탶들의 안내에 따라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마이갓...
여전히 낭만당 안에 가득차 있는 사람들 때문인지 계단을 올라가는 속도는 무척 느렸다. 조금씩 조금씩 정상에 다가갈 무렵 스탶들이 시간이 조금 지연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사쿠라 카페만 이용하실 분들은 먼저 입장하실 수 있다고 한다. 단 낭만당에서의 상품 구입은 불가. 여기서 사람들이 조금 빠져나갔는데, 카페는 내일도 있으니 오늘은 일단 낭만당에 주력하기로 하고 자리를 지켰다. 도대체 낭만당 안은 지금 어떤 상황인걸까.
드디어 7층까지 올라오자 태정낭만당으로 통하는 비상구가 눈앞에 보였지만 여전히 입장은 쉽지 않았다. 비상구 앞에서는 스탶 두어명이 10분 정도 간격으로 10명씩 차례차례 입장시키고 있었다. 점점 줄이 줄어들고 이번에는 우리차례로구나 하며 들어갈 준비를 하는데 스탶이 외치길
'자 6명 입장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우리 앞에서 잘랐다-_-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낭만당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이미 시간은 8시가 넘어있었다.
비상계단에서 바라본 암럭스 빌딩
입구가 눈앞에
힘들게 입장하긴 했지만 낭만당 안에서도 여전히 줄을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여유로운 쇼핑은 커녕, 상품구입 대열에 합류하는 것만으로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아까 밑에서 줄서고 있을 때 스탶들에 받은 안내문에는 29, 30일 모두 9시까지 영업한다고 쓰여 있었지만, 이래서는 절대 제 시간에 끝마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입장부터가 8시를 넘어버렸는데 뭘.. 만약 시간 됐다고 정말로 딱 끊어버렸다면 이케부쿠로에서는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다.(거짓말)
한손에 바구니를 들고 앞사람을 따라다니며 살 물건들을 고르고 있자니 어디서 배급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3주 전에도 조금 휑하긴 했지만 아직 상품들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진열대가 채워져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이미 1500포인트를 다 모아서 더 이상 이곳에서 이룰 게 없었던 나였지만, 날이 날인 만큼 예전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던 것들에도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하나 둘 바구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태정낭만당에서는 3월 24일부터 무려 70% 할인판매가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난 이미 돈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었다.
막 입장하고 나서 찍은 사진.
입장하고 나서도 상품구매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저 앞으로 전부 줄이다.
카페는 그나마 덜 붐비는 편.
폐점기념 스페셜 상품이 놓여있던 자리였는데, 내가 입장했을 때는 이미 다 팔리고 없었다.
남아있는 건 평범한 상품들 뿐.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진열대에는 태정낭만당 리뉴얼 기념 일러스트들이 쭉 붙어있었다. 1주년 기념
2주년. 뉴욕 캐릭터들이 본격적으로 참가.
3주년. 상단부터 제도, 뉴욕, 파리
4주년. 아쉽게도 5주년은 맞이하지 못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카운터에 도달해 계산을 마치고(아마도 이틀 동안 카운터 보던 직원들은 죽을 맛이었을 듯) 다시 복도로 나오자, 비상구 쪽 한켠에서는 제비뽑기가 한창이었다.
만화에서 보던 구슬통을 돌리는 방식의 제비뽑기였는데, 1000엔 이상 구매자는 누구나 시도 할 수 있었고,(1000엔당 구슬 1개) 경품은 시시한 것부터 관계자들의 싸인이 들어간 레어물품까지 여러 종류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런거
제비뽑기 쪽 카운터로 다가가 영수증을 건네주자 내게는 15개의 구슬을 뽑을 권한이 주어졌다. '하나~ 둘~ 셋~ 넷~' 스탶의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구슬이 하나 둘씩 굴러 나오기 시작했고 역시나 뽑기 운 없는 나답게 두어개를 제외하고는 전부 흰구슬이 나와버렸다.(흰구슬=기본 경품) 황금색 구슬을 뽑아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만세를 부를 생각이었건만...
제비뽑기까지 마치고 그나마 홀가분해진 우리는 복도를 빠져나와 엘레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시간은 이미 10시가 넘어있었지만 여전히 낭만당 안은 줄 서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엘레베이터 앞의 벽에는 각 캐릭터 들을 향한 메세지 보드와 팬들이 보낸 일러스트 응모작들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고, 방명록이 있던 책상은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에스컬레이터 앞에는 태정낭만당/사쿠라카페 폐점 이벤트를 기념하는 커다란 전언판이 붙어 있었고, 어디에선가 보내온 화환들도 눈에 띄었다. 나 역시 얼마남지 않은 이곳에서의 시간을 아쉬워하며 이곳저곳에 나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을 위해 준비한 회심의 역작도.
팬들의 성원이 한가득
위치가 안좋아서 그랬나 제미니나 에리카 쪽이 좀 썰렁했다.
나도 한마디.
요코야마 치사씨에게 보내온 화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일러스트 수상작 모음
대형 전언판.
큐슈화격단 미야자키 본부에서 왔음!! 사쿠라대전이여 영원하라!!!
사쿠라대전을 만나서 정말 좋았습니다. 고마워요!
오래전 부터 팬이었어요. 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벚꽃 흩날리는 꿈의 이어짐을 언제까지나
푸치는 내 색시!!
코란에게. 평생 사랑합니다. 힘내요. 코란도 쌍둥이 낳아주세요.(코란役의 후치자키 유리코씨가 2005년 쌍둥이를 출산하셨음)
그리고 회심의 역작....!
두 둥
김화백님 전 해냈습니다.
사실 이 '회심의 역작' 은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3주 전 태정낭만당에서 여느때처럼 방명록을 뒤적거리다 노트를 장식하고 있는 팬들의 그림을 보고 '나도 뭔가 의미있는 것을 하나 남겨야 하지 않겠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데 귀국하고 보니 안그래도 실력도 없는데 따로 그림 그릴 시간을 내기도 힘들고 뭐 어물어물대다 어느새 폐점이벤트는 며칠 앞으로 다가와 버렸다. 염치불구하고 그림 좀 한다는 친구들에게 부탁해 봤지만 그들도 밥 로스 아저씨가 아닌지라 하루아침에 뚝딱 그려 낼 수도 없는 일 ojL
..하지만 드라군이 출동하면 어떨까?
'흔적 남기기' 를 끝내고 잠시 낭만당 안을 어슬렁 거리다 UFO 캐쳐 앞에서 멈춰 섰다. UFO 캐쳐에는 아픈 추억이 있어서 전에도 그다지 눈이 가지 않았었지만(2003년 처음 일본 갔을때 아키하바라에서 발견한 사쿠라대전 UFO 캐쳐에 좋다고 달려들었다가 한개도 못 뽑고 몇천엔을 훌렁 날렸던...ㅡㅜ) 폐점을 앞둔 지금 한번 더 도전해 보고 싶었다.
주머니에 남아있던 동전을 꺼내 도전해 보았지만 이번에도 몽땅 꽝;;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기에 지폐를 꺼내들고 동전으로 교환하려고 하는데 생각해보니 낭만당 안에 동전교환기 같은 건 없었다.(...) UFO캐쳐 앞에 있던 스탶에게 동전을 좀 바꿔달라고 부탁하자 난처한 얼굴로 말해주길.. 아직 상품 구입을 마치지 못한 손님들이 많아서 카운터에도 잔돈에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ㅂ=
결국 방법은 아래층의 게임센터로 내려가서 교환해 오는 것 밖에는 없는데, 29ㆍ30일 이벤트의 룰에 의해 한번 낭만당을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었다. (일단 엘레베이터부터 운행을 안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스탶께서 자신이 직접 나가서 바꿔 올테니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 감동ㅜㅜ
그렇게 2000엔을 동전으로 바꿔 다시 도전했지만 역시 번번히 실패; 김군과 내가 계속해서 삽질을 하고 있자 옆에서 보고 있던 스탶도 딱했는지 기계를 열더니 그냥 뽑아가라고 배출구 바로 앞에 상품을 배치시켜 주었다-.- 스탶님의 물심양면에 걸친 도움 끝에 드디어 나는 마우스패드 세장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_^
UFO 캐쳐
안에는 마우스패드와 주머니(?) 등의 상품이 들어있다.
마우스패드 GET!!
UFO캐쳐까지 정복(?) 하고 더 이상 특별히 할 일은 없었지만 여전히 아쉬움은 남아있었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언제까지고 이곳에 남아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낭만당 안에서 미적대고 있는데 늦었다며 돌아가자는 김군의 말에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다 되어 있었다. 우리가 입장한게 8시 쯤이었으니 순식간에 세시간이 지나가 버린 셈이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도 '그대여 꽃이여' 의 노래가사 마냥 시간은 잔혹하기만 하다.
서둘러 태정낭만당을 내려와 신오쿠보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러 갔다. 주말의 늦은 열차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이 아니었다. 돌아와서는 괜히 나 때문에 따라와서 수고해 준 김군에게(저녁도 못먹었다;;) 술이나 살 생각으로 근처의 술집을 찾아갔다.
원래는 알콜의 힘을 빌어 마지막을 앞둔 나의 온갖 감정을 토해낼 작정이었으나, 상대인 김군이 사쿠라대전에 별 관심이 없다보니 흥이 나질 않아서인지, 아니면 아직 하루가 남았다는 안도감에서인지 술자리는 생각보다 들뜨지는 않았다.
그러든 말든 시간은 최후의 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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