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자고 있던 김군이 갑자기 내쪽으로 몸을 굴리는 바람에 한번 깨기는 했지만, 아침까지 죽은듯이 잠들어 있었다. 겨우겨우 이불을 치우고 일어나니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하고 온 듯한 기분이다. 시계를 보니 아침 9시 무렵. 좀 더 일찍 일어나려고 했었는데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뭐 급할 건 없었기에 대강 준비를 마치고 김군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틀짜리 올빼미 여행에 관광하러 온 건 아니니깐.. 오후 5시에 시작하는 앨리스 인 원더랜드의 천추락 공연을 보러가기 전, 오전 동안의 비는 시간에 아키하바라나 다녀 올 계획이었다. 김군도 아직 일본에 온 뒤 아키하바라에 가본 적이 없었다고 하기에 마침 잘 되었다 싶었다. 어제 비가 내려서 그런가 끝내주게 맑은 날씨였다.
신오쿠보 역 근처에서 요시노야와 쌍벽을 이루는 덮밥집 마츠야(松屋)로 가 아침을 먹었다. 이곳에서는 규동의 라이벌(?) 격인 규메시(牛めし)를 팔고 있었는데, 요시노야에서처럼 판매시간이 제한되어 있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꿩 대신 닭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먹기로 했다.
아침을 먹고 신오쿠보역에서 조금 더 걸어가자 JR 소부선(総武線)의 오쿠보(大久保)역이 나왔는데, 그곳에서 전철을 타고 곧바로 아키하바라로 향했다.
일본에는 작년 8월에 이어 약 8개월 만에 오는 것이지만 그때는 계획을 다 짜놓고도 충동적(?)으로 아키하바라를 안갔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거의 1년 3개월만에 오게 된 셈이었다. 간만에 아키하바라의 전기상가 앞에 서게 되니 괜히 들뜨기 시작했다.
아키하바라역을 나서며
오~ 폼 좀 나는데
이미 거리엔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아직 11시가 되지 않아 문을 열지 않은 매장이 많았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내면서 지갑을 열어 남아있는 돈을 확인해 보았다. 여기서 밥먹고 이따 집에 갈 차비 빼고..어??? 그런데 이것저것 빼고나니 게임 살 돈이 그다지 남아있지 않은 것이었다. 어 분명 완벽하게 예산을 짜왔는데 어느새.. 또 태정낭만당에서 무리해 버렸나-.-
결국 게임구입에 열을 올릴 필요가 없어져버린 우리는 나는 그냥 느긋하게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게임 몇개를 돈 되는대로 대충 구입한 뒤로는, 게임매장이 보여도 밖에서만 슬쩍 보고 지나쳐 버렸다. 들어가면 또 사게 되니까..-.-; 이런 내모습을 보며 김군은 '플스를 한국에 놓고 오길 잘했다' 며 안도하기도.
이날은 일요일이라 아키하바라의 전기상가 거리는 차량통행이 금지되어서 보행자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자전거도 안된다) 또 곳곳에서 코스프레며 깜짝 공연을 펼치는 사람들 때문에 굳이 게임구입에 열올리지 않아도 볼거리는 아주 많았다. 아침에는 각각 산개해있던 코스플레이어들은 오후가 되자 슬슬 합세하며 무리를 이루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차가 지나갈 수 없다.
말그대로 보행자 천국
대세는 역전재판 4
이왕이면 난 이 빨간 건물을 고르겠어!!
허 걱
형 여기서 뭐하세요
몰려있는 사람들 사이로 코스플레이어들을 쫒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대다 2시쯤 되어 점심을 먹으러 모스버거로 갔다. 모스버거는 그동안 일본을 오가면서 유명하다 유명하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가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마침 아키하바라에도 있다길래 그냥 한번 가보기로 했다.
마침 점심 때라 그랬는지 모스버거 안에는 주문을 기다리는 줄이 늘어서 있었다. 메뉴를 보고 각자 먹을 햄버거를 고른 뒤 우리 차례가 왔는데, 어째선지 알바누나랑 의사소통이 잘 안되서 주문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점심을 해결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좀 더 사진을 찍어대던 우리는 3시쯤 더 이상 할 일이 없었기에 신주쿠로 돌아가기로 했다.
코스프레
이쪽은 코스프레는 아니고 자신의 공연같은 걸 홍보하고 있었다.
모스버거
아키바계 아이돌이라고 하나? 거리에서 반주 하나 틀어놓고 노래하는 아가씨들을 쉽게 찾아볼수 있었다.
이름이 '유키' 라고 한다.
'꿈빛 몬스터' 라는 밴드의 보컬 '아키코'
노래는 이분이 좀 더 잘했던 것 같기도
뭔가 찌라시 같은 걸 잔뜩 들고 있던 다른 코스플레이어들과 달리 빈손으로 코스프레를 즐기고 있던 메이드 콤비.
뉴욕 OVA 광고가 붙어있었다.
김군을 신오쿠보에서 보내고 신주쿠에서 내려 스페이스 107을 찾아갔다. 역시나 천추락이라 그런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어제보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던 건,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맨 남자였는데 일반적인 스탶은 아닌 것 같았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번호표를 배부하기 시작했고, 어제랑 비슷하게 입장 한시간 전에 왔음에도 나는 40번을 받게 되었다. 번호표를 받은 사람들은 어디론가 뿔뿔히 흩어졌고, 나 역시 근처 상점들을 배회하며 시간을 때웠다.
얼마간 시간을 보내다 입장시간이 다가왔기에 스페이스 107로 돌아와 다시 줄을 섰다. 이윽고 입장이 시작되었는데, 이번 공연의 출연진 중 한명인 도이 슌이치씨가 직접 입구에 나와 티켓을 체크하고 있었다.
번호표는 어제보다 뒤였지만, 빈자리가 있어서 앞에서 세번째 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가방을 올려두고 밖으로 나와 공연 OST를 구입했다. OST CD에는 각 출연진들의 싸인이 쓰여져 있었는데, 아쉽게도 니시하라씨의 싸인 CD는 이미 품절이어서, 고민 끝에 오카다 준코씨의 싸인 CD를 구입했다.
다시 돌아온 스페이스 107
40번..
공연 시작 전 구입했던 OST CD
오카다 준코씨의 싸인. 그건 그렇고 OST를 공씨디에 구워 팔다니.
다시 자리로 돌아와 공연을 기다리는데, 아까 사람들을 안내하던 나비넥타이의 남자가 무대 앞에 나타났다. 그가 바로 어제 공연 시작 전 멘트의 주인공이자, 이 공연의 수퍼바이저 및 음악을 담당하고 있는 성우 츠쿠이 쿄세이씨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때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공연은 즐거웠다. 건담 시드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나름 친숙한 오다 히사후미씨의 힙합 체셔 캣이라던가, 도이 슌이치씨, 아마노 유우씨, 나가야마 사토코씨의 만담개그.. 카와모토 히로유키씨의 침 팍팍튀는(^.^;;) 애드립에, 카리스마 다나카 사토시씨.. 뭐 굳이 줄거리를 이곳에다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새삼 느끼게 된 점이라면..주인공 앨리스 역을 맡으신 오카다 준코의 재발견??
오카다 준코씨는 고등학교 때 새턴으로 센티멘탈 그래피티를 하다가 알게 된 이름인데(사실 시기로만 보면 니시하라씨 보다 더 빠르다) 이 공연의 멤버중 니시하라씨를 제외하고는 내가 유일하게 이전부터 알고 있는 분이었다. 그 뒤 은퇴하셨다는 말을 들었고 후속작에서 타에코 역의 목소리도 다른 성우로 교체되었길래 그냥 그렇게 잊고 있었는데, 생각도 못했던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웠다.
사실 극단 21세기 폭스 시절부터 앨리스를 해오신 니시하라씨가 다른 역을 맡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는데, 공연 속 오카다씨의 모습을 보고는 납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이스와 프릴이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고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アリスって言います~' 라고 말하는 오카다씨의 모습은 앨리스 그 자체>.< 이번 앨리스 공연도 오카다씨가 강력히 희망해서 이뤄지게 된 거라고 하니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셨을지 짐작이 갔다.
공연이 끝나고 공연장 앞의 좁은 복도는 수많은 사람들로 몸을 둘 곳이 없었다.
도이 슌이치씨는 테이블 앞에서 OST 및 사진들을 파느라 눈코뜰새 없었는데, 잠시 후 엄청난 아이템이 나타났다. 바로 니시하라씨가 공연 도중 착용하신 리본과 왕관 @a@!! 100엔부터 시작한 경매는 500엔, 1000엔, 3000엔으로 순식간에 가격이 올라갔고 사람들은 그 이상이라도 부를 태세였지만, 절대 1000엔 이상으로는 팔리지 않게 해달라는 니시하라씨의 전언이 있었다며 결국 최고액을 부른 세명이 가위바위보로 결정.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끼어보는 건데...
오카다 준코씨 사진 몇장.
♡쿠미땅과 함께♥
산스이 루이(맞나?)ㆍ사이토 히로유키로부터
흑의 여왕님께
도이 슌이치씨가 들고 있는 저 리본은 공연 도중 니시하라씨가 착용했던 것
그 밖에 남아있는 상품들의 정리도 거의 끝나고, 사람들도 슬슬 빠져나가는 가운데 나는 오늘만큼은 혹시 니시하라씨가 나오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좀더 기다렸지만, 오늘도 먼저 가셨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쉽사리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나에게 7시 40분에 문을 닫아야하니 양해바란다는 츠쿠이씨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아, 이젠 가봐야지.. 하며 계단 쪽으로 향하는데 오카다 준코씨가 아직 남아있던 관객들과 한마디씩 주고 받는 모습이 보였다.
용기를 내서 오카다씨에게 말을 걸었다.
나: 수고하셨습니다.
오카다: 아, 감사합니다!
나: 이 공연 때문에 한국에서 왔습니다. (엄청 버벅댔다. 왜이리 말이 안나오던지..)
오카다: 어머나~ 정말요??
나: 다음에도 공연이 있다면 꼭 보러 오고 싶네요.
오카다: 네, 꼭 와주세요~
아무 얘기나 더 하고 싶었는데, 여전히 남아있는 상품처리에 정신없던(벽에 붙어있던 포스터도 떼다 팔았다-.-) 도이씨가 오카다씨를 부르면서 회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을 떨쳐내며 스페이스 107을 나왔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
스페이스 107을 떠나며
신오쿠보역에서 김군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먹으러 나오라고 한뒤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귀찮은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곧 들통날 것이므로 그렇다고 하는데, 역시나 같이 교회를 가자 저녁을 먹자 하면서 날 피곤하게 했다.
내가 이래서 신오쿠보를 싫어하는거야.
집요한 남자를 겨우겨우 뿌리치고 김군을 만나 저녁을 먹은 뒤 다시 원룸으로 돌아와 귀국할 준비를 했다. 잠깐 동안의 여행이었기 때문에 맨몸으로 올까 하다가 혹시나 해서 여행가방 하나를 끌고 왔는데, 의외로 짐이 많아서 안가져왔으면 들고가는데 고생 좀 했을 것 같다..
신오쿠보에서 김군과 헤어져 하네다로 가는 전철을 탔다. (신오쿠보→시나가와→하네다공항)
확실히 이시간에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없는지, 시나가와에서부터 열차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식당 이름은 기억이 안나는데 아무튼 햄버거 정식인가 하는 걸 먹었다.
이륙하기 전. 창가에 앉아서 신났음-.-
출국할때처럼 비행기 안에서 한숨도 못자고 몸부림치다 2시 조금 넘어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어차피 집으로 가기엔 시간도 없고 공항에서 바로 사무실로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공항철도 첫차가 출발하는 시간까지 공항에서 시간이나 때우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공항 구석에 찌그러져 앉아있으니 여행이 끝난 뒤의 아쉬움도, 잠 한숨 못잔 피곤함도 느껴지지 않고 그냥 꿈이라도 꾼 듯 얼떨떨한 기분이다.
..정말 꿈같은 주말이었다니깐?
이런 기분?
기차가 오면 난 다시 REAL WORLD로
'西原 久美子' 카테고리의 다른 글
KUMIKO PHOTOSHOP (4) | 2008.01.05 |
---|---|
ALICE & ME (8) | 2007.08.03 |
2007 곤잘레스 In Wonderland Day1 (4/28/2007) (10) | 2007.05.26 |
2007 곤잘레스 In Wonderland 前夜 (4/27/2007) (4) | 2007.05.05 |
미치도록 아름다운 (3) | 2007.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