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고꾸라져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김군이 보였다.
영문을 묻는 나에게 밤 사이에 에노시마를 다녀왔다고 한다.
어디라고...
에노시마라면 내가 평소에 김군에게 여긴 꼭 한번 가봐야한다며 침이 마르도록 추천하던 곳이긴 했는데 한밤중에 거길 다녀왔다니. (나같으면 무서워서 못간다.)
김군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싶어서 더 묻지는 않고 11시 쯤 원룸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우왓... 거짓말같이 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일본에 와서 처음 맞아보는 햇빛에 마치 매트릭스 세계에서 해방되는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네오.
이케부쿠로에 도착해서 세가 GIGO로 가니 11시 30분 정도였다. 정우형과는 12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도 한참 남았겠다, 먼저 태정낭만당으로 올라가 잠깐 시간을 보내다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12시가 되어도 정우형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어제도 그랬듯이 이때만 해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좀 늦나보네' 하며 계속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30분이 지나도 정우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해가 비춘건 좋았지만 그만큼 날도 더워졌기 때문에 계속 서서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었다. 나는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정우형이 긴급할 때 연락하라던(어제 함께 술자리를 가졌던) 친구분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친구분: 여보세요?
나: 안녕하세요. 어제 정우형이랑 같이 있었던..
친구분: 아아~
나: 정우형이 안나와서 그러는데 혹시
친구분: 아.. 어제 새벽까지 술을 마셨거든요.. 지금 아마 자고 있을거예요..
나: ..........
친구분: 어떡하지, 금방 못일어날것 같은데;;
............
그냥 할 말이 없었다.
정우형 날 위해 이런 떡밥을 준비해 놓다니.
혹시 연락이 올지 모르니 이따가 한번 더 전화달라는 친구분의 말을 뒤로 하며 나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1시까지 기다려 본 뒤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역시나..
이대로 계속 기다리다간 오늘 하루가 다 갈 것 같아서, 나중에라도 연락이 오면 오전 약속은 취소하고 저녁 7시에 같은 장소에서 만나자는 말을 전해달라고 한 뒤 나는 세가 GIGO를 떠났다.
태정낚시터
그 뒤 GIGO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K-BOOKS나 애니메이트 같은 곳을 잠깐 기웃거려 보았으나 최신 트렌드의 애니나 만화 등에 무감각한 내게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이미 기운이 쭉 빠져버린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결국 점심으로 마츠야에서 카레 한그릇 먹고는 이케부쿠로를 떠나 혼자 아키하바라로 향했다. 거기라면 좀 나으려나.
아키하바라역에 도착해 전기상가 쪽으로 나오니 날씨도 그렇고 어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오늘(7월 16일)은 무슨 바다의 날인가 해서 휴일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때문에 원래 어제 시행해야 했을 보행자천국을 하루 미룬 듯 했다.
거리 곳곳에서는 개성 넘치는 밴드들의 노상 라이브가 펼쳐지고 있었다. 어제도 아키하바라에 왔었지만 이런 길거리 공연을 보지 못해서 아쉬웠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오늘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공연을 구경하는 동안 종일 우울했던 기분도 한결 나아졌고, 원래 어디 게임샾에나 가서 하루종일 죽치고 있다 와야겠다던 생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아키하바라의 명물 노상 라이브를 감상해 봅시다.
가장 처음 눈에 띄었던 Fly At Zero. 기타치는 분이 꽤 간지났음
이날 가장 많은 구경꾼을 몰고 다녔던 POPROCK 밴드 GANG BANG PARTY
노래는 못하지만 통통 튀는 매력의 보컬 토모리.
체크무늬 원피스와 양갈래로 땋은 머리가 포인트.
그런데 이 친구들 이거 무슨 뜻인지는 알고 팀명으로 한건가. 강방호님한테 혼날려구.
토모리 독사진 찰칵!
GANG BANG PARTY와 함께 이날 아키하바라 거리를 양분하고 있던 유메이로 몬스터. 지난 4월에도 본 적 있는 얼굴이라 반가웠다.
오늘도 뛰어난 가창력과 발군의 쇼맨쉽을 보여주었다.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보컬 아키코.
의상이라던가 악세사리가 노래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대표곡인 'For You' 의 영상을 찍어보았습니다.
카메라를 들이대도 싫은티 전혀 안내고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잡아주는데 감동.
역시 지난 4월에 보았던 유키. 이날 음향장비가 안좋았는지 상당히 고생했다. 다른 팀들은 밴드형식으로 나와서 그나마 도와주는 사람이라도 있는데 이쪽은 혼자라서.. 노래 좀 할라치면 지지직-.-
말 안듣는 장비와의 사투 속에서도 노래는 계속되었다.
자신의 노래를 다 마친 뒤 저 멀리 서있는 토모리를 부르는 유키
뭔가 속닥속닥
둘이 친한 듯
자신의 히트곡(?) '一輪の花'(한송이의 꽃) 을 토모리와 함께 부르기로..
가사는 잘 몰라도 일단 부르고 보자.
간주가 시작되자 마이크를 토모리에게 넘겨주고 어디론가 사라진 유키. どうしょう~ 를 연발하며 발을 구르던 토모리였지만 간주 끝나기 전 아슬아슬하게 유키가 돌아왔다.
君は~ そう, 一輪の花~ みんな~ そう, 一輪の花~♪
쟤네 뭐야... 무서워......
이쪽은 '아사쿠라 사쿠라' 라는 분인데, 노래 컨셉이 외모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한.
독사진~ 저 오른쪽에 있는 남자가 카메라를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얼굴을 가려버렸다-.-
라이브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고 시간은 6시를 훌쩍 넘겨 있었다. 공연을 하던 팀들이 이구동성으로 저녁부터는 요도바시 카메라 앞으로 무대를 옮길테니 그쪽으로도 많이 보러 와달라고 하길래 이케부쿠로로 가기 전에 잠깐 들렀다 가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요도바시 카메라로 가니 그곳에서도 노래하는 사람들, 자작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각양각색의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있었다. 낮에 봤던 밴드들이 한자리에 모여 생일파티 같은 이벤트를 하는 모습을 지켜 본 뒤, 그 뒤 뭔가 더 공연이 펼쳐질 기색은 없었기 때문에 서둘러 이케부쿠로로 향했다.
히밤 다뎀벼~~~
한자리에 모여서
태정낭만당에 도착하자 7시가 조금 넘어서였는데 연락이 안되었는지 정우형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방명록을 뒤져보자 정우형이 오늘 날짜로 쓴 글이 보였는데.. 뒤로 몇장 넘겨보니 내가 14일에 적었던 '형 오늘 온다더니 왜 안왔어요?' 라는 글 밑에 정우형의 글씨로 '16일에 왔어..-_-' 라고 쓰여있었다.
점원을 붙들고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잠시 갸우뚱하던 점원들은 확실하진 않지만 6시쯤 왔던 것 같다는 말을 들려준다. 그렇군..
뭔가 딱하다는 눈빛으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점원들에게 '아글쎄오늘여기서누구랑만나기로약속을했는데그사람이술먹고못일어나서제대로낚였습니다' 라고 말하려다가 왠지 주접 떠는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정우형 얼굴 보기는 이제 글른 것 같고, 사쿠라 카페에서 밥이나 먹고 가기로 했다.
그래서 고른 것이
그리시느 도리아(840엔)
비싸서 그렇지 맛있었다.
에리카 논알콜 칵테일(819엔)
석류맛의 탄산음료.
(사진출처 태정낭만당 홈페이지)
에리카 코스터
태정낭만당을 나와 신오쿠보로 돌아오니 김군은 없고 룸메이트만이 원룸에 홀로 남아 있었다. 김군의 행방을 묻자 자기도 모르겠다는 대답.
잠깐 나간 것 같지는 않은데 휴대폰도 놔두고 어딜 간 거지 하고 있는데 책상 위에 휘갈겨 쓴 쪽지 한장이 보였다.
'형 나 여행가. 어쩌구저쩌구 미안하구 담에 봅시다'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건지.
누구는 배트맨 마냥 밤만 되면 사라지고, 누구는 이케부쿠로 한복판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누구는 사람 뒤나 캐고 다니는 흥신소 업자가 되어있고,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내가 꿈속에서 정우형을 본 건지, 김군이 내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 모든게 히로이 오지가 만든 가상세계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의 교훈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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